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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슈퍼에서 고기를 사다

BigGun 2008. 12. 13. 05:14
겨울이 다가오니까 함께 어학연수를 하던 친구들이 한국으로 떠납니다. 12월이 출국시즌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어학연수를 6개월에서 10개월 사이로 오는데, 12월과 6월이 가장 이동이 많은 시기입니다. 아마 한국에서 학교를 휴학하고 온 사람들이 많아서 복학시기를 맞추기 위한 것 같습니다. 하도 많이 가니까, 그리고 나도 이제 곧 갈거니까 특별히 파티 같은 것은 안합니다. 한국이 작은 나라지만 막상 귀국하고 나면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지만 그냥 가벼운 인사로 헤어집니다. 하지만 얼마전에 한국교회에서 만난 친구는 떠나보내는 것이 아쉬워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식사 한 번 못해보고 헤어진다는게 많이 아쉽더라구요. 그동안 갈고닦은 음식실력을 발휘하기 위해 메뉴를 적어봤는데, 1번으로 불고기가 낙점됐습니다. 손님 대접엔 불고기 만한 것이 없는 것 같더라구요. 정말 안타깝게도 영국 마트에서는 불고기감을 할 만한 얇은 소고기를 팔지 않아서 한국슈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왠만하면 항상 팔던 불고기감 소고기가 딱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주 메뉴가 불고기였기에 상당히 난감했습니다. 스테이크 고기를 사다가 할 생각도 했지만, 지난 번에 고기 씹다가 턱 빠질뻔한 일이 문뜩 생각났습니다. 다행히도 아르바이트 학생이 아랍 슈퍼를 추천해줬습니다. 한국 슈퍼 옆에 있는 아랍 슈퍼에 가면 정육점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한국 슈퍼 2층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음식재료 걱정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먹을게 다 떨어져도 잠옷 차림으로 1층으로 내려와 라면 몇 개 사가면 되니까요. 그런데 이 집에서 산 7개월동안 아랍 슈퍼가 바로 옆에 있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대개는 테스코나 아스다 같은 영국 마트에서 장을 봐왔기 때문이죠. 그러고도 부족한 것은 한국 슈퍼에서 샀으면 되니까요. 막상 아랍 슈퍼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왠지 모를 어색함이랄까. 그래도 내일 모레면 손님이 올것이기에 과감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영국에서 외국계 슈퍼에 와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막상 들어와 보니까 별 차이는 없더라구요. 다만 아랍쪽에서 수입된 상품이 많았습니다. 그렇다 해도 물건이 완전 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포장지에 있는 모델이 중동쪽 사람이란게 좀 큰 특징일 뿐이었습니다. 알바 학생 말대로 정육점은 슈퍼 안쪽에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정육점가면 참 난감해 했기에 여기서는 주문 하기가 더 난감했습니다. 앞에서 머뭇머뭇하면서 있자, 정육점 직원이 필요한거 있냐면서 말을 걸었습니다. 소고기가 필요하다고 했고, 두 말 없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되묻어더라구요. 한참을 생각하다가 5파운드 어치 줄 수 있냐고 하니까 오케이 하면서 고기를 썰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얇게 썰어달라고 했더니 문제 없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나서 무게를 재고 가격표를 붙여서 저한테 건내줬습니다. 문 바로 앞에 있는 계산대에서 계산을 치루고 나니 마음이 아주 홀가분 하더라구요. 기쁜 마음으로 고기를 들고 집에 들어왔습니다.

    왜 아랍 슈퍼에 들어가는게 어색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문화에 대한 이질감? 좀더 솔직하게 말하면 아랍 문화에 대한 저항감? 좀더 노골적으로 '아랍 사람들이 파는 슈퍼에 어떻게?' 하는 문화적 우월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아랍 슈퍼는 정말 그냥 슈퍼였습니다. 다만 아랍 제품을 판다는 것이었죠. 사실 저한테는 더 좋은 곳이었습니다. 제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거든요. 대충 슈퍼를 봤지만 소고기 햄도 팔고 야채로 만든 음식이 상당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옛날 부터 알았으면 더 잘 이용했었을 거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어렵게 들어가본거지요. 만약 외국인들이 한국 슈퍼에 들어와도 비슷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야 한국말이 익숙하지만 외국인들에게 한국말이 써진 라면봉지는 아주 어색했겠죠. 김치도 그렇고 슈퍼 앞에 잔뜩 쌓여있는 쌀푸대도 그랬을겁니다. 그런데 저는 단 한번도 이게 어색할거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습니다. 내가 익숙한 문화니까 아무런 필터링 없이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영국에 있다보면 한국 학생들이 여러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외국에서의 '위축감'입니다. 피부색도 다르고 영어도 잘 못하고 허우대도 작은 한국인이 영국에서 사는게 그리 쉽지 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이곳 사람들이 동양에서 온 사람들을 무시하는 거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도 있습니다. 거의 없긴 하지만 아주 가끔씩 영국 청소년들이 한국인을 쳐다보고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욕을 하기도 합니다. 영국 청소년들이 양아치인 거는 영국 사람들도 두손두발 든 문제거리입니다. 슈퍼에서 점원이 좀 냉정하게 말하거나 어학교 직원이 불친절할 때 한국인들은 훨씬 많이 화를 냅니다. 물론 그 자리 앞에서는 그렇게 못하고 나중에 한국인들끼리 모이면 불평을 늘어놓지요. 그러면서 우리를 무시하는 거 아니냐 하는 말을 하곤 합니다. 이런 말은 비단 이곳에서만 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병 생활을 했을 때도 동료들이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외국군과 생활하다보니 가끔씩 외국인들도 대화할 일이 있는데 그 때마다 그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아프가니스탄 생활 초창기에는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미군 PX에서 물건을 살 때 직원이 불친절하면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위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렇게 느낄 만한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관찰해 보니까 그 직원은 한국인한테나 미국인한테나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괜한 자격지심에 나한테만 그런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생활할 때 이런 느낌을 가져 본적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아애 없다고는 못합니다. 이곳에도 자국인이 아닌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나라도 똑같습니다. 어찌보면 우리나라가 더 심한 것 같습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한 혈통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네에 외국인이라도 들어오게 되면 상당한 거부감을 갖습니다. 이것은 정말 안좋은 습관으로 이어져 유럽계 외국인들한테는 친절하고 그 외의 외국인들한테는 불친절하는 심지어 무시하고 깔보는 듯한 시선을 보냅니다. 이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 겁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이웃집 사람한테 보내는 똑같은 시선을 보내왔습니까? 부끄럽지만 정말 솔직히 말하면 저는 한국에서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무시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왔고 나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약간 어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국은 말 다했지요. 이곳은 한 혈통이 없습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등 여러가지 피가 다 섞여 있습니다. 식민지도 많이 거늘였던 역사도 갖고 있어서 아프리카 쪽 혈통도 상당히 있습니다. 우리나라 같이 단군을 조상으로 생각하는 식의 사고를 이들은 아애 갖고 있지도, 갖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들이 외국인들에게 갖는 태도가 더 관용적입니다. 제가 다니는 스포츠 클럽 수영장을 가보면 3분의 1정도는 외국인들입니다. 한국에서는 가당키나 한 말인가요? 상상해 보세요. 동네 수영장에 흑인 한명이 들어와서 수영하고 있다고 하면요. 사람들이 아주 난리가 날 겁니다.

    자기가 생각하는데로 세상을 본다는 말이 있지요. 여기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무시해왔다면 영국 사람들도 나를 무시할거라는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고관이니까요. 하지만 생각을 바꿔서 우리는 다 같은 세계시민이라고 인식하게 되면 이런 문제는 금새 해결됩니다. 세계 경제 12위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우리 보다 못한 나라 사람들은 여기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동유럽 사람들, 중동에서 온 사람들 아주 당당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이 그런 의식을 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면에서 선진국이냐 후진국이냐 하는 말을 꺼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긴 하지만 아직 의식면으로는 많이 부족한 듯 합니다. 물론 영국 사람들도 외국인을 차별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그 수는 정말 일부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사회가 앞선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위축된 한국인들은 영국 슈퍼에서 무표정으로 점원을 대합니다. 그러면 점원도 무표정으로 응대하지요. 그러면 이들이 또 무시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오래 동안 살아온 한국인들은 이런 점을 이해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긋 웃으면서 점원에게 말을 걸지요. 그러면 100% 환한 미소와 함께 대화가 이어집니다. 결국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모든게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백인이라고 우러러 볼 것도 없고 흑인이라고 깔 볼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나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친구처럼 대한다면 내 마음 속에 있는 자격지심은 금방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혹시라도 상대가 왜곡된 생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아주 당당하게 행동한다면 상대의 마음까지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세계화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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