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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동의부대

2화 파병 지원 준비

BigGun 2011. 12. 11. 18:04
지난 이야기..
온갖 어려움을 뚫고 정보병으로 입대한 나는 강원도 홍천 산골의 작은 대대에 배치받게 되었고, 열심히 적응하여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라크 파병을 다녀온 전산병과 며칠 지내면서 파병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아주 우연히 아프가니스탄 파병 부대 선발 공고를 보게 된다.

파병을 가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그 뿐이었다. 내 앞에 있는 장벽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일단 사실 나부터가 충분한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약간 창피한 말이지만 나는 아프가니스탄이 아프리카 어디쯤에 있는 나라인 줄 알았다. 좀더 솔직히, 아프가니스탄을 에디오피아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육군에 있는 1년 동안 국내 안보에만 집중하다보니 세계정세에 대해 감각이 많이 떨어졌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결심한 뒤 - 에디오피아로 생각한 상태에서 - 김혜자씨도 가는 곳이니 아무리 덥더라도 참고 견딜 수 있다는 자기 체면을 계속 걸었다.

파병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때부터 파병을 지원하려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가고 싶다고 결심을 하였다 하더라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집에서의 허락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날 저녁 늦게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지원하겠다는 말을 했다. 사실 집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고, 내가 파병의 위험성보다는 얻게 되는 장점들을 열거했기 때문에 그냥 떨떠름하게 마음대로 하라는 식의 답을 얻었다. 집에서의 허락까지 얻은 이상 선발되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하기로 했다.

일단은 나부터 다산부대와 동의부대 사이에 선택을 하여야만 했다. 다산부대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름을 빌려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공병부대였고, 동의부대는 허준 선생의 명저 동의부대에서 이름을 따온 의무부대였다. 다산부대의 모집인원은 150여명, 동의부대는 50여명. 규모상 다산부대가 훨씬 컸다. 당연히 내가 지원할 수 있는 보직도 더 많았다. 행정병이라든지 정훈병, 어학병 등등. 하지만 웬지 모르게 좁은길을 가길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 동의부대가 많이 끌렸다. 어짜피 경쟁률이 높은 이상 다산부대든 동의부대든 뽑히는 것은 운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왕 파병을 가자고 결심한 이상 내 마음이 끌리는 곳에 지원하고 싶었다. 당시에 우리 부대에는 공병 관련한 일을 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고, 가끔씩 놀러가는 의무대에서 의무병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터라 의무부대가 더 친숙했던 이유도 있었다. 의무병들을 엉터리라고 놀리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그들이 치료에 임하는 모습을 본다면 쉽게 그런 말을 하기 어렵다. 최소한 내가 상대했던 의무병들은 그랬다. 그들은 대개 간호학, 약학 등을 전공한 경우가 많아서 작은 상처를 치료해줄 때도 진지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총 58명이 한 팀이 되는 동의부대 9진 중에서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육군 사병 할당 인원은 겨우 6명이었다. 전국에 많은 군인들이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꿈꾸고 있을 터인데 6명이라는 숫자가 너무나 작아보였다. 게다가 정보병은 단 한 명을 선발했다. 정보병 1명, 통신병 1명, 통역병 1명, 보급병1명, 그리고 운전명 2명이 전부였다. 군대도 2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대한 마당에 한번더 부딪쳐 보기로 했다. 지원에 필요한 것은 지원 홈페이지에 개인 인적사항을 넣고 자기소개를 쓰는게 전부였다. 이후 내 병역기록표와 지휘관 평가 및 추천서를 우편으로 보내면 되었다. 약 300자 정도 되는 자기소개를 쓰기 위해 그 날 밤 많은 고민을 했다.

아주 짧은 에세이의 메시지는 이러했다. "50여년 전 우리나라는 한국전의 영향으로 최빈국이었다. 그 때 세계 각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러한 번영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도움을 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군에 있으면서 세계평화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내 일생에 가장 큰 영광이 될 것이다. 그 어떤 어려움도 나의 의지 앞에서 무력화 될 것이다." 누가 보면 무슨 전쟁 출전서 정도될 법한 의미심장한 자기소개를 제출했다. 물론 그 때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어떤 말을 썼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정도의 내용을 담았던 것 같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파병지원 당시 나는 아프가니스탄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마 빈라덴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은 조금더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온라인 지원을 마치자 내무반에서 내 옆에 생활하며 냄새나는 것으로 유명했던 인사과 선임병의 도움이 절실했다. 사실 이 고참은 더럽다기 보다는 환경이 그 사람을 더럽게 만들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씻을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고, 짬이 되지 않아서 자기가 여유있게 업무조절을 하지도 못했다. 그러한 탓에 빨래도 잘 못하고 샤워도 못해서 항상 쾌쾌한 냄새가 났다. 내가 그 옆에서 자야했으니 항상 곤욕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어쩌랴, 고참이니 참을 수 밖에. 어쨌든 애만 먹이던 고참병이 이제는 나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인사기록부를 제출할 때나 그것이 상위부대에 전달될 때 이 사람의 도움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육군에서 파병을 간다는 것의 의미는 매우 영광스럽고 중요하며 부대 차원에서도 명예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명의 숙련된 사병이 아쉬운 입장에서는 쉽게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즉 소대장이나 중대장, 심지어 대대장 차원에서 파병지원을 막아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설득을 통한 경우도 있었지만 지원서를 상급부대에 보내지 않는 것 같은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면 지원자는 자신이 실력이 없어서 뽑히지 않았다고 자책하겠지만 실은 상급부대에 지원서 조차도 전달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번엔 지휘관 추천서. 추천서라고 해서 복잡한 것이 아니라 A4 한장이었는데, 성실성, 업무숙달과 같은 평가항목에 상, 중, 하 중에서 평가를 해주고 맨 끝에 추천의 말을 적는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대대 보안평가에서 우수한 결과를 얻어낸 공로로 참모장교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고, 참모들에게 칭찬을 받은 본부 중대장은 당연히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사고도 안치고 조용히 지내는 한 명이었으니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추천서를 출력하여 중대장실에 갔건만 마침 전투체육하는 날이라서 축구를 하느라 행정반에는 서무병 한 명만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다행히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고참이어서 파병에 지원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혹시라도 중대차원의 서류상 도움이 필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축구를 열심히 하고 온 중대장이 사무실로 들어왔고, 간단히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지원했다는 것과 중대장님의 추천서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장교들 사이에서는 파병에 대한 선망이 컸다. 차후 승진을 하는 과정에서 남들과 차별화 될 수 있는 경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파병을 다녀온 후 운신의 폭이 커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였을까. 예상과 달리 중대장은 정말 쿨하게 평가와 추천의 말을 써주었다. 자기가 못가는 거 한 중대에 있는 사람이나 보내자라는 생각 혹은 어짜피 떨어질 것 추천서라도 잘 써주자 같은 생각 아니면 축구하고 와서 힘들어 죽겠으니 얼릉 써주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생각. 여러가지 생각에서 추천서를 써주었겠지만 평가는 매우 좋았고, 짧지만 강렬한 추천사를 써주었다. "내가 지휘관이라면 반드시 이 사람을 뽑겠다"라는 식의.

모든 절차가 마무리 되었다. 온라인 지원은 이미 마감되었고, 인사병은 내가 가져온 추천서와 인사기록부를 잘 봉인하여 상급부대에 안전하게 전달해주었다. 기억은 확실치 않지만 대대장 승인서명이 필요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중대장과 인사병의 도움으로 별 무리없이 받아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경쟁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일단 지원이라도 한 번 해보라는 심사였던 것 같다. 모집공고를 확인하고 나서 최종지원까지 3일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무척이나 긴박하고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내 주변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도달했다. 당연히 인사과 고참은 내 지원사실을 알았지만 소대의 다른 사람들은 잘 몰랐다. 그리고 정보과에서 가족처럼 지냈던 정보과장과 정보담당관도 지원사실을 몰랐다. 일단 어느정도 가시권에 들어오고 나서 말을 하자는 생각이었다. 괜히 자기들 싫어서 떠난다는 생각하면 문제가 될 테니까 말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집에서의 허락이었다. 지원을 하겠다고 생각한 날 전화를 했을 때는 별 말씀이 없으시더니 지원을 마치고 나고 전화를 하니까 반응이 달랐다.

아프가니스탄이 어느 나라인줄 아느냐, 오사마 빈사덴이 아직 안 죽은걸 알고 있느냐, 아직도 테러와의 전쟁인 중인 걸 알고 있느냐 등등. 세계사를 전공하신 아버지가 어머니로부터 아프가니스탄 지원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집에서 절대 보낼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이후였다. 최종합격을 하더라도 집에서 파병동의서를 써주어야만 했고, 그 내용인 즉슨 파병 중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마치 수술동의서 같은 것이다. 다행히 동의서는 최종합격을 하고 나서 제출하면 되었다. 파병 합격 발표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 동안 이 모든 난관을 한개씩 넘어가야하는 더 큰 일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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