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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결심하다 본문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동의부대

1화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결심하다

BigGun 2011. 12. 10. 21:55

연재를 시작하며..

2006년 2월부터 9월까지. 7개월. 인생에 있어서 짧은 시간, 100살까지 산다고 봤을 땐 0.6% 정도의 기간.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7개월'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58명 동의부대 9진의 일원으로서 '치열'하게 보내야만 했던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공군기지에서의 7개월의 시간. 한동안 기억속에 묻혀두었던 그 시간, 위험했던 짜릿했던 그 누구보다 슬펐고 즐거웠고 아름다웠던 200여일간의 기억을 이곳 BigGunBlog.com에 남긴다.

왠만한 선배들이 카추사에 가서 금요일 저녁이면 학교에 나타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건만. 10명 중 8명이 카추사에 간 02학번과 달리 03학번에서는 10명 중 1명이 겨우 붙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육군은 아니다"라는 말을 누구에게서 들었는지는 몰라도 왜인지 공군, 소방, 방산 심지어 해외봉사까지 고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엔 육군이 가장 깔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복무기간도 그렇고 - 당시는 24개월, 딱 2년이었다 - , 많은 사람들이 육군을 다녀왔으니까. 하지만 그냥 훈련소에 가기는 싫었다. 이른바 '땅개'의 한명이 된다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결국 알아낸 것이 특기병 지원이었고, 요즘은 많이 달라진 것 같지만 2004년에는 특기병으로 선발되면 논산에서 훈련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논산으로 가면 국직부대나 후방으로 간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의 최적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정보병이라는 특기는 매우 생소했다. 군대를 가지 않은 미래가 불안불안한 21살의 대학 2학년에게는 더 그랬다. 특기병이라하면 운전병, 행정병이 대부분이었고 아니면 정말 '특기'병들이었다. 굴삭기운전면허라든지 이름도 복잡한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만이 지원할 수 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평범한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고3 졸업하기 전에 운전면허를 따서 운전병에 지원할 수 있었고, 왠만한 정보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서 행정병에 지원할 수도 있었지만 달랑 2명 선발하는 정보병에 지원했다. 아마도 이름이 주는 세련미, 지식층(?)과 같은 이미지, 그리고 담당업무 설명을 보았을 때 대북정보탐색 및 군사정보를 다룬다는 말에 솔깃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정보특기를 영어로 바꾸면 'Military Inteligence' 즉 우리가 CIA를 부를 때 사용하는 Inteligence로 칭함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른바 '인텔리' 군인일 것 같다는 선망이 있었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여럿있었는지 2명 선발에 무려 54명이 지원하여 27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24개월 육군에 가는 마당에 칼복학을 하고 싶었고 당시 2월 입대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런 불안감에 나는 정보자격증을 1개 더 취득했고 심지어 면접 연습까지 했다.

서울병무청에 가서 예전 박카스 광고에서 보암직 한 "꼭 가고 싶습니다!"류의 면접을 보고 나왔고, 며칠간 불안하게 기다리다가 최종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온라인으로 합격을 확인했는데 당시 분위기는 대학합격 발표를 확인했던 기분과 유사했다. 하지만 이윽고 밀려오는 입대의 불안함 막연한 공포. 어찌되었던 27대 1의 정보병이라는 자부심으로 입대까지 마음의 준비를 했고, 친구들의 환송모임 때에도 마치 CIA나 FBI에 들어가는 특수요원처럼 뭔가 있는 듯 말을 했었다. 실은 정보병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서 일하는지 아무것도 모른채 말이다.

여기서 그 이후 논산에 가서 결국 강원도 홍천 시동에 있는 3기갑여단 91기보대대 본부중대 참모소대 정보병으로 내려오기까지의 사연을 1화에서 설명하자면 읽은 분들은 지루하실테고 나는 눈가가 촉촉할 정도로 옛생각이 떠오를 것 같아 과감히 각설하도록 하겠다.

결과적으로 2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했건만 이 무슨 놀라운 국방부장관님의 뜻인지, 논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와서 경춘천을 갈아타고 춘천에 도착, 다시 홍천행 버스를 타고 홍천에서도 산골 중의 산골 시동리에 있는 3기갑여단에 가게 되었다. 그것도 여단 정보과가 아닌 대대 정보과. 정보병이 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조직이 대대 정보과이다. 알고보니 정보병이라는 특기는 내가 선발된 이후 없어져 버렸고,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내 앞 사수까지는 정보학교라는 곳에서 후반기 교육도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것도 없이 바로 논산에서 홍천으로 직행을 한 것이었다. 사실 정보병의 업무를 하다보니 사실상 정보학교에서의 후반기 교육이라든지 특기병 선발자체가 무의미했다. 국방부가 바보가 아닌이상 불필요하게 예산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을테지.

어찌되었든 업무는 다른 행정병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던만 이른바 '땅개'라 불리는 일반보병 1111의 특기에서 약간 차이가 나는 1511이라는 특기번호를 부여받고 정보과에서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상급부대에서 정보병 업무를 하신 분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대대급에서의 정보병이란 조금 애매한 위치였다. 물론 '정보'라 불리는 것들을 취급했지만 그리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정보취급 2급인증을 받아 -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복잡한 신원조회까지 해야한다 - 부대에서 몇 명 볼 수 없는 서류들을 '취급'만 했다. 서류들을 보관하기 위한 금고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려 5단계에 이르는 보안단계를 거쳐야하는데 장교들이 일일히 하기 어려우니 내가 보조를 해줘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홍채인식이나 지문인식으로 들어가는 멋들어진 곳은 아니었고 번호키와 여러개의 자물쇠로 이뤄진 창고같은 곳이라 서류 한번 꺼낼라치면 여러모로 번거로웠다.

정보라는 말의 범위가 넓어서 대대 안의 여러가지 일들을 관여하긴 했었다. 예를들어 휴가를 갔던 사병이 책이나 음반을 사가지고 오면 보안성검토라는 것을 정보과에서 했다. 아마도 유신정권 때 사병들이 민주화 관련 서적이나 혹은 '불온서적'을 반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작한 업무 같은데 오늘날 같은 시대에 이른바 이념서적이나 친북관련 된 자료들을 가져오는 사람은 있을리가 만무했고, 다만 남성잡지 - 에스콰이어, GQ, 혹은 맥심 - 에 과다한 노출이나 자극적인 소재가 있으면 반입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또 중요한 것은 복사업무였다. 사실 처음에 정보과에서 일하면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통해 했던 말은 "야, 나 무슨 여자비서 된거 같아. 맨날 복사하고 커피타고 청소하고. 그게 전부야." 같은 전방에 근무하면서 맨날 같이 '개고생'하셨던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나름 특수요원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입대한 나에게 이러한 업무는 상당한 고역이었다. 어찌되었든 '군사기밀' - 여기서 기밀이라하면 군대 내에서 이뤄지는 모든 사항을 의미한다 - 이 마음대로 유출이되면 안되었기 때문에 복사기는 상당히 중요한 장치였다.

복사를 하면 복사용지에는 어디서 복사를 했는지 인식이 기록이 되었고, 누가 어떤 내용을 몇장 복사했는지도 꼼꼼히 기록하여야 했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보안정책과 비교해 보면 당시 대한민국 육군의 보안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지 한탄스럽기도 하지만, 컴퓨터가 해야할 일을 내가 직접 담당하면서 벼래별 서류를 볼 수 있었다. 기록 뿐만 아니라 직접 복사를 하는 일이 많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복사기와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복사기는 외주관리를 받았고 장당 요금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엉뚱하게 파지를 만드는 것은 낭비였다. 그러다 보니 얻게 된 것은 아주 능숙한 복사능력이다.

'아... 파병은 도대체 언제 결심하는거야' 라는 생각을 하실 것 같다. 결심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서두가 길었다.

어리숙한 이등병 생활을 마치고 어느정도 업무가 익숙해지고 간부들로부터 인정도 받으며 소대에 후임병들도 있어서 약간의 여유를 즐기게 된 일등병 말시절. 당시 이라크 파병에 가는 사병들에 대한 소식이 국방일보를 통해 전해졌고 파병에 대해 전혀 관심조차도 없었던 나는 그런데 가는 사람들이 대단해 아니 정신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냥 가만히 군생활을 마칠 것이지 테러의 위험이 넘실대는 전쟁터에 뭐하러 가냐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전투병이 아니라 공병이나 의무병들이 나가는 경우가 많아서 정보병인 나로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 파병의 물결은 홍천 산골까지 밀려왔고 인사과 선임병이 한가득 인사기록명부를 가져오더니 복사를 부탁했다. 파병에 지원하겠다는 사람들의 서류였다. 얼마나 군생활이 힘들었으면 이 먼곳까지 가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복사를 하면서 어떤 정신나간 사람인지 사진을 몇번이나 확인하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어느정도 후보인원이 추려지니 신원조회의뢰를 하는 단계까지 갔다. 정말 무슨 생각으로 파병을 가려고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우리 대대는 상위부대로부터 대대적인 감사를 받게 되었고, 정보분야도 빠질 수가 없었다. 며칠간 고생을 해서 관련 서류를 작성하고 보안관련 지적을 받지 않도록 부대내 정보관련 사항을 체크하느라 녹초가 되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당시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전산보안 분야를 밀접하게 다뤘었다. 원래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전문가보다 박식하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내가 그 정도였던 것은 아니지만 대대장 컴퓨터가 이상하다고 하면 나를 불러서 고쳐보라고 할 정도였으니 부대내에 있는 컴퓨터는 내 손바닥 위해서 관리되었다. 그래서 감사기간 중 전산보안를 담당하러온 상위부대 사람들을 내가 직접 의전해야 했다. 간부가 보고를 받고 시찰을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보안상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그 간부와 함께 온 전산병이었다. 지금은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조차도 기억나지 않지만 여단 전산실에서 근무하는 컴퓨터 도사였던 것 같다.

감사 전에 전 간부들 퇴근도 안시키고 보안교육 및 부대내 컴퓨터를 이잡듯이 분석해놓은 탓에 전산보안 관련 지적사항이 별로 없었다. 감사 받을 때 너무 지적사항이 없는 것도 참 애매한 일이긴 하지만 - 감찰 담당자들이 보고할 것이 없으니까 - 전산보안 관련하여 문제점이 많으면 상급부대가 후속조치도 해줘야 하고 일반사병 입장에서는 업무가 늘어나다 보니 그 전산병은 우리 부대의 상황에 상당히 만족을 했다. 게다가 내가 1대1로 밀착 의전을 하면서 식사부터 간식 심지어 입에다 담배까지 물려 줬으니 이른바 '아저씨'인 관계에서 상당한 호사를 누리게 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었다. 하지만 아직 감사가 끝난 것이 아니었고 나는 여전히 '을'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말을 열심히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알게된 것이 이 사람이 이라크 파병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국방일보에서 봤던,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파병을 가냐 라고 했었던 바로 그 사람이 내 옆에 있는 것이었다.  원래 전산병들은 마치 엄청난 '갑'이 된것처럼 하위부대 담당자를 나무라고 문제점을 찾기위해 노력을 많이 하였는데 이 사람은 그런 기색이 별로 없었다. 지금은 그 사람의 당시 태도가 이해가 되지만 당시에는 이상하리만큼 감사를 나온 사람 같지 않았던 것도 파병을 다녀온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전산병은 이라크 파병 당시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고, 나도 호기심을 가지고 듣게 되었다. 파병지의 환경은 척박하지만 그래도 지금 부대보다는 오히려 더 좋을 수 있다는 것, 위험하긴 하지만 그 위험의 정도가 피부로 느껴지질 정도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평생 해볼 수 없는 경험이라는 것 등등 며칠간 그 사람과 같이 다니면서 파병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던 자이툰 부대원들. 나중에는 내가 그들 중 한 명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감사는 무시히 끝났고 군생활 1년차가 거의 마무리 되는 시점이 되었다. 이제 업무도 익숙해졌고 부대에서도 꽤 인정을 받는 상황이었다. 고참들도 이등병 때 와는 달리 어느정도 나를 대우해주었고 정보과에 후임병도 들어온 상황이라 그 어느 때보다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평온한 시점에 "이렇게 또 1년을 보내야 하는가"라는 막연한 생각이 맴돌았다. 군대는 전쟁을 대비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매일, 매주, 매월, 매년의 순간이 그리 바뀌지 않는다. 물론 갑작스러운 외부요인에 의해 얼마간 변동이 될 수 있지만 전쟁이 나지 않는 이상 그냥 국방부 시계는 소리없이 돌아간다. 이제 익숙해진 업무지만 또 1년을 똑같은 방식으로 지내야 한다는 것은 마치 데자뷰를 매일 경험하는 것 같았다. 어찌보면 너무 우스운 생각이지만 난 새로운 일을 찾고 싶었다. 군대에서 새로운 일이라. 일반 기업이라면 무슨 프로젝트라도 하나 맡아서 T/F를 구성하여 특별업무를 추진하겠지만 내가 있었던 곳은 국방부나 육군본부도 아닌 일선 대대에 불과했다.

결국 나의 시선은 외부로 향했다. 그 전까지는 부대내 메일이나 결재문서를 보냈던 국방부 인트라넷의 세상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경험은 또 해보기 어려울 것이었다. 인트라넷은 군 내부에서만 접속할 수 있었지만 그 곳은 인터넷 못지 않은 정보가 넘쳐흘렀다. 아마도 대학이나 사회에서 온갖 경험을 하던 사람들이 보여있는 곳이다 보니 인트라넷에도 벼래별 공간이 있었다. 심지어 기무사령부에서는 불온전 사이트를 찾는 캠페인을 벌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무리 내부전산망이라고 해도 워낙 전국적으로 퍼져 있으니 중앙에서 감시를 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싸이월드 같은 사이트도 있었고 리니지 서버를 개설한 사람도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심지어 19세 관련 자료가 유통되기까지 했다고 하니 가히 IT 강대국이라 할 만 하다. 이러한 별천지를 알게 되었으니 중요한 업무가 없으면 대개 인트라넷을 뒤지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그렇다고 쓸데없는 것 검색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기 보다는 일선 대대급에서는 알 수 없는 정보나 상위부대의 업무에 대해서 파악을 하는 것이었다. 예를들어 국방부에서 어떤 공문을 하위 부대에 날리면 육군본부에서 각 군 본부로, 거기서는 차하위 부대로, 그 다음에도 계속 그런식으로 내려와 대대급에서 확인을 하려면 1주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인트라넷을 알게 된 이후로는 바로 국방부 지시사항을 확인해서 1주일 후에 도착할 내용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같이 검색하게 된 것은 파병관련된 정보였다. 하지만 많은 정보를 얻기 어려웠고 이라크 파병간 부대가 개설한 자이툰 부대의 홍보 홈페이지가 정보소스의 전부였다. 국방일보에 파병에 대한 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워낙 일부에 불과했기에 인트라넷 상에도 정보가 별로 없었던 것이었다.다만 파병을 가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제한된 정보에 안타까워하며 불만을 털어놓는 사병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 인사과장이 컴퓨터가 이상하다는 연락을 받고 저녁쯤에 인사과를 방문했다. 저녁시간이라 다들 밥을 먹으러 갔고 나는 여유롭게 보안 프로그램을 돌려놓고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아주 우연히 인사과장 모니터 옆에 있는 서류 거치대에서 "아프가니스탄 자원병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2006년 2월부터 8월까지 아프가니스탄에 가게되는 동의부대, 다산부대 특기병 선발에 대한 내용이었다. 공고를 보는 순간 심장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구나!' 나는 그 서류를 들고 바로 정보과로 가서 복사를 한 후 가슴팍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어두운 연병장으로 나가 강원도 산골의 시컴한 하늘에 박힌 쏟아질 듯한 별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일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의 파병 이야기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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