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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삼성전자 `원톱` 나섰다 … 최지성 대표이사 사장

BigGun 2009. 12. 20. 14:27
디지털 보부상에서 16만 직원 지휘하는 `마에스트로 최`로
삼성전자 엔지니어 아닌 영업맨 출신 첫 CEO
독일 1인 사무소장 시절 얻은 `보부상`별칭이…TVㆍ휴대폰 잇단 성공에`디지털 보부상`으로
끝장보는 성격ㆍ현장영업 경험ㆍ빠른 의사결정…`2020년 매출 4배

 

1977년 여름 경기도 용인의 삼성그룹 연수원.

삼성 공채로 입사한 신입사원 최지성은 희망 계열사를 적으라고 하자 1지망부터 3지망까지 내리 '삼성물산`만 써냈다. `무역입국`이 경제의 슬로건이던 시절 삼성물산은 서로 가고 싶어하는 회사였다. 이를 받아본 당시 삼성그룹 인사팀 책임자는 "무슨 이런 신입사원이 있는가"라며 심히 불쾌해 했다. 그러나 당시 신입사원 교육 조교이던 김인 삼성SDS 사장은 책임자를 설득해 최 사장이 삼성물산에 배치되도록 도왔다. 김 사장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고집스럽게 관철시키는 모습을 통해 장차 큰일을 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한다. 최 사장은 삼성물산에서 근무하다 때가 되면 오퍼상으로 독립할 생각이었으나 일을 하면서 회사에서 승부를 걸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삼성물산에서 처음 배치된 부서는 잡화과였다. 이때부터 이쑤시개부터 신발, 문구 등 말 그대로 `잡다한 상품`을 팔러 동분서주한 생활이 시작됐다. 그후 삼성그룹 비서실을 거쳐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으로 옮겨갔다. 1985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1인 사무소장으로 발령이 났다. 말이 사무소장이지 혼자서 D램 반도체를 가득 담은 가방을 차에 싣고 유럽 곳곳에 팔러 다녔다. 처음에는 어느 업체를 찾아가야 할지 몰라서 전화번호부에 `○○전자`나 `○○컴퓨터`라는 상호가 나오면 전화부터 걸고 봤다. 문과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000페이지가 넘는 반도체 기술교재를 통째로 암기했다. 국경을 넘나들며 무박 2일짜리 출장도 많았고 스위로 가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던 중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도 두 번이나 당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 부임 첫해 혼자서 100만달러어치의 반도체를 팔았다. 이듬해에는 500만달러, 그 다음해에는 2500만달러어치를 팔아치웠다. 유럽 곳곳을 누비며 해마다 5배씩 매출을 늘리자 어느덧 회사 내에서 `유럽의 보부상`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최 사장에게는 항상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삼성전자 40년 역사상 이공계(엔지니어)가 아닌 영업맨 출신이 대표이사 사장 자리에 오른 것은 그가 처음이다. 2006년에는 보르도TV를 앞세워 소니를 제치고 TV사업을 처음으로 세계 1위에 올려놓았다. PC용 모니터, 휴대폰 등에서도 잇달아 성공신화를 쓰면서 별명이 `디지털 보부상`로 바뀌었다. 해외시장을 개척한 디지털시대의 첨단을 달리는 보부상이란 의미다.

오늘의 최지성 사장을 있게 한 요인은 과연 뭘까.

맨 먼저 한번 손댄 일은 끝장을 보는 성격을 꼽을 수 있다. 높은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가혹하게 자신을 채찍질한다. 당연히 워커홀릭(일중독자)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어김없이 회사에 나온다.

해외출장을 가면 시차에 관계없이 전화를 걸어 업무지시를 내린다. 한국에 있는 직원들은 새벽이고 밤이고 최지성 사장의 전화를 받는다. 삼성전자 한 임원은 "차라리 최 사장이 국내에 있을 때가 편하다. 해외 출장을 가면 임원들은 24시간을 일해야 한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지난 10월 최지성 사장은 남미 8개국을 열흘 만에 도는 강행군을 펼쳤다. 시차와 이동거리를 감안하면 하루에 한 국가씩 들른 셈이다. 비행기 안에서도 전략회의를 하고 비행기에서 내려서는 바로 해외거래처와 업무 미팅을 하거나 현지 매장을 둘러보며 철저하게 일에 승부를 건다.

밑바닥 영업현장 경험도 CEO로 대성하는 데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입사 초 문구류를 수출하기 위해 문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단가를 맞출 수 있는 업체를 찾은 후 바이어와 협상해 신용장을 개설하고 물건을 팔았다. 제대로 영업하려면 제품의 제조공정, 제조원가, 무역, 금융까지 거의 모든 프로세스를 꿰고 있어야 한다. 반도체부터 TV, 휴대폰 등 삼성에서 만드는 제품을 팔다보니 해당 제품에 대해서는 담당자 이상으로 아는 게 많아졌다. 이처럼 디테일에 강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직을 완벽하게 장악하게 됐다. 제아무리 자기주장이 강한 부하라도 자신보다 더 많이 아는 상사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빠른 의사결정 또한 그의 장점이다. 최 사장은 아무리 복잡한 문제도 질질 끄는 법이 없다. 부하 직원들이 한밤중까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끙끙대다가 이메일을 보내면 그는 곧바로 새로운 시각에서 해결책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답장을 보낸다.

지난 15일 삼성 사장단 인사에서 최 사장은 또 한 차례 집중 조명을 받았다. 지금까지는 이윤우 부회장과 삼성전자의 투톱으로 활동했는데 이번 인사에서 `원톱`으로 나선 것이다. 최 사장은 인사가 나자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는 조치를 취했다. 16일에는 삼성전자 임원들의 승진ㆍ이동 인사를 단행했고 17일에는 2개 부문으로 나뉜 `옥상옥`의 조직을 없애고 10개 사업부를 7개 사업부로 재편했다. 조직의 군살을 빼 의사결정 속도를 높이고 책임경영을 강화했다. 18일에는 전 세계 삼성전자 현지 법인장들을 모두 불러들여 `2010년 경영전략회의`를 앞당겨 개최했다.

그가 바꿀 삼성전자는 어떤 모습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추론 가능하다. 지난 9월 가전제품전시회인 IFA2009에서 최 사장은 "2012년 디지털 황금기가 본격화되면 마켓셰어는 기업이 가진 가장 강력한 자산이자 미래"라고 밝혔다. 절대적인 시장지배력 확보를 위해 나서겠다는 얘기다. 소비자와 수요 중심으로 시장을 세분화해 기능과 디자인 측면에서 차별화된 제품으로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최 사장이 맡는 삼성전자는 전 세계 194곳에 거점을 갖고 전체 종업원만 16만1700명에 달한다. 글로벌시장에서 점유율 1위인 제품만도 D램 반도체. TV, 모니터 등 12개나 된다. 그는 이제 16만명의 단원을 거느린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총지휘자가 됐다. 이 지휘자는 각 악기의 특성을 정확히 알고 있는 만큼 조화로운 화음을 통한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일만 남았다.

목표는 이미 높게 주어져 있다. 바로 삼성전자가 지난달 1일 창립 40년을 맞아 선포한 `비전 2020`이다. 매출을 2020년까지 지금의 4배로 키워야 하는 미션이다.

이제 최 사장의 별명이 `디지털 보부상`에서 `마에스트로(Maestro) 최`로 바뀔 때가 왔다. `마에스트로 최`가 보여줄 최상의 연주를 기대해본다.

■ "시골 출신인데 몸이라도 성해야 도회지 출신 따라잡지"

출근길 세상 뜬 공장장발인까지 매일 찾아애틋한 후배사랑


2007년 1월.

당시 이학수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장(부회장) 빙부상에 삼성 CEO들이 대부분 모습을 나타냈다. 최지성 사장도 조문을 했는데 독감에 걸린 아픈 몸이었다. 최 사장은 "그동안 일하느라 바빠서 감기 걸릴 여유도 없었는데 요즘 일을 조금 등한시한 모양이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바쁘면 아플 틈이 없다는 것이 최지성 사장의 건강론이다. `시골 출신이 몸이라도 성해야지 도회지 출신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 어릴 적부터 신조다.

최 사장은 오랜 해외 주재원 생활로 골프 실력은 수준급이지만 거래처와의 중요한 약속을 제외하고는 골프채를 잡지 않는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엄습했던 올해 상반기에는 아예 골프장에 나간 적이 없다. 골프가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운동이기도 하며 실적을 올리기 위한 경영에 `올인`하기 위해서였다.

담배는 피우지 않지만 주량은 대단하다. 한창 때는 폭탄주 10여 잔을 마시고도 사무실로 돌아와 다시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지난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가전전시회 IFA2009 때 기자간담회를 하면서 본인 스스로 여러 잔의 폭탄주를 만들어 돌리기도 했다.

최 사장은 소통하는 CEO로 알려져 있다. 회사에서 이메일 답신이 가장 빠른 사람으로 소문나 있다. 밤 10시에 부하직원들이 보내 놓은 이메일에 대한 답장을 새벽 2~3시에 보내 부하직원들이 놀라는 경우가 허다하다. 거의 24시간 컴퓨터 네트워크에 접속한 상태라는 얘기다.

차에서도 일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다. 노트북이 설치돼 있고 자동으로 인터넷에 연결되도록 돼 있다. 종일 PC와 스마트폰을 들고 씨름을 하다 보니 어깨와 손가락이 아플 정도라고 한다. 최 사장은 "어깨와 손가락이 아픈 것이 직업병 같다"고 농담 삼아 얘기할 정도다.

평소 부하직원들에게 다정다감한 상사는 아니지만 후배를 아끼는 속마음은 끔찍하다. 철저하고 지독하게 일을 하는 모습만을 보아온 기자는 올해 초 `인간 최지성`의 또 다른 단면을 목격했다.

휴대폰을 만드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의 장병조 공장장(부사장)이 1월 18일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휴일이라서 자신이 직접 운전해 구미사업장으로 가던 중 변을 당했다. 최 사장은 만사를 제쳐두고 발인 때까지 매일 삼성병원을 찾아와 직접 장례식 절차 등을 챙겼다. 기자가 "무척 바쁘실 텐데 계속 상가를 지키시네요"라고 말을 건네자 "당연합니다. 함께 일해온 너무나 소중했던 사람이라서…"라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최 사장의 투철한 국가관은 자타가 공인한다. 회사가 잘되도록 열심히 뛰는 것이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되며 이게 애국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삼성 제품을 팔기 위해 중국의 하얼빈과 중앙아시아 곳곳을 다니며 과거 약소국이던 고려인들의 후예를 만나면서 이 같은 그의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지금 대한민국이 좋은 궤도를 달리고 있지만 앞으로 30년은 이 같은 분위기가 지속돼야 한다.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 있는 우리나라는 좀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한민국이 보다 더 잘살게 됐을 때 `삼성이 국가발전에 기여를 했구나`라는 얘기를 듣고 싶다."

■ 최지성 사장은

춘천중학교를 졸업한 뒤 춘천고를 1년 정도 다니다 서울고로 옮겨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자기 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세서 `딸깍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71년 서울대 무역학과에 들어갔으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박정희 독재정권 타도 운동에 앞장섰다. 당시 최 사장과 함께 서울대 상대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선배 중에는 지난 4월 경기도교육감에 당선된 김상곤 씨,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이 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면서 데모가 아니라 실력을 쌓아 사회에 보탬이 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1977년 삼성물산에 입사하면서 삼성과 첫 인연을 맺었다. 신입사원 때는 신발 문구 주방용기 등 잡화를 판매하다 회장 비서실을 거쳐 1985년 삼성반도체로 옮겼다.

1998년까지 삼성전자에서 반도체판매를 담당하다 정보가전총괄로 자리를 옮겨 TV 사업을 맡았다. 2004년에는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 겸 디자인경영센터장을 맡으며 사장 반열에 올랐다. 2007년에는 정보통신총괄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삼성 휴대폰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렸다.

지난 1월 조직개편 때 삼성전자의 완제품을 생산하는 DMC부문장을 맡아 부품을 생산하는 DS부문 대표인 이윤우 부회장과 투톱 체제로 일해오다 지난 15일 사장단 인사 때 삼성전자를 단독으로 맡는 총괄 CEO가 됐다.

1979년 결혼해 1남1녀를 두고 있다. 타고난 일벌레에 매년 평균 100일이 넘는 해외출장 등으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 미안해하는 가장이다. 장녀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형 로펌에서 일하고 장남은 고려대 공대를 졸업하고 삼성전자에 입사해 현재 휴대폰 상품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김대영 기자 / 이승훈 기자 / 사진 = 김성중 기자]
매일경제 / 2009년 12월 19일자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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