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Gun's Blog

[본머스 칼럼] 2008년 12월 2일 늦은 6시, 비오는 창가 옆에 앉아 본문

UK Story/본머스 칼럼

[본머스 칼럼] 2008년 12월 2일 늦은 6시, 비오는 창가 옆에 앉아

BigGun 2008. 12. 3. 19:29

세상은 공평하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느끼기로는 그렇다. 한때 - 아주 어렸을 때 - 나는 사람들이 영국의 윌리엄 왕자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안타깝게도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사진은 그의 어머니, 다이애나의 장례식에서 침울하게 서있는 장면의 사진이다. 전세계의 많은 이들이 우수에 찬 윌리엄의 눈망울과 그의 훨칠한 외모에 흠뻑 빠졌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슬퍼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그 사진을 간직하고 있으니. 하지만 나의 윌리엄 왕자에 대한 동정심을 딱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그가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일단 윌리엄 왕자는 '왕자'이다. 보통나라도 아닌 영국의 왕자다. 지금은 영국이 시들시들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대국이다. 그리고 영국왕실은 아주 부자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성공적인 비즈니스 덕택에 그의 자손들이 아주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게다가 여왕의 장수는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혜택을 주고 있다. 영국의 전통상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어야지만 그의 아들 찰스 왕세자가 왕위를 물려받는데, 그게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현재 여왕이 80살이 넘었으니까 찰스 왕세자가 최소한 50살이 더 되었다는 것인데, 여왕의 어머니가 100살 넘게 살았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찰스 왕세자는 운좋게 70살이 되어서야 '왕'이 될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아주 장수를 한다면 말이다. 모르겠다. 사는 동안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장수를 할런지는. 아무튼 이 때문에 혜택을 받는 사람은 다름아닌 첫째 왕자 윌리엄이다. 아무튼 왕위를 물려받게 될 잘 생기고 부자고 인기 많은 그 남자가 뭐가 부러울게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조금 그가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느끼는 점은 그것이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영국에 8개월 정도 혼자있다 보니 외로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정말 실감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을 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그 때는 외로움보다 무서운 것들이 더 많았다. 죽음과 질병에 대한 공포가 더 컸다. 왜 그런말이 있지 않은가. 긴박할 때 오히려 더 건강하다고. 마치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가 해안에 도달했을 때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나운 물고기 한 마리를 어망에 넣는 이치이다. 게다가 아프간에는 7개월 있었다. 그리고 전우들이 있었다. 좁고 더럽고 시끄럽긴 했지만 나무막사에서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생활했다. 하지만 지금은 훨씬 넓고 깨끗하고 조용한 방에서 '럭셔리'하게 살고 있지만 심리적 궁핍함은 그 때와 비교할 것이 못 된다. 그 때는 침대 매트리스가 엉망이어서 허리가 완전 망가졌지만, 허리회복을 위해 걱정해주고 딱딱한 나무 침대를 만들어 준 동료들이 있었다. 지금은 더블 침대에서 굴러다녀도 되지만 저녁 늦게 잠에 들때면 외로움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한마디로, 어머니가 없는 윌리엄 왕자는 세상 그 누구보다는 불쌍한 남자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들어 그가 참 측은해 보인다. 영국 사람들이 찰스 왕세자에 갖고 있는 불편한 심기는 상상 이상이다. 영국 대중의 공주였던 다이애나와 이혼하고 엉뚱한 미국 여성(카밀라를 지칭한 것이었는데, 독자의 지적으로 내용을 정정합니다. 카밀라는 미국인이 아니라 영국인입니다.)과 결혼한 그는 파렴치한 중에 최고로 꼽혀진다. 그래서일까 영국왕실도 영국정부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오랫동안 살기만을 바라고 있다. 괜히 일찍 돌아가셔서 찰스 왕세자한테 왕위가 물려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듯 한 사람에게 실망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기대게 된다. 지금 그 대상이 윌리엄이다. 나 같아서 윌리엄이면 정말 숨이 조일 것 같다. 럭셔리한 생활도 하루이틀이지 매일 같이 잘 살면 좋은 것도 모른다. 그런데 가끔씩 터지는 사건사고는 잠도 제대로 들지 못하게 할 정도로 그를 불안하게 만든다. 대학도 스코틀랜드와의 친선을 위해 런던을 멀찌감치 떠나 '귀향살이' 하듯 다녀야 했고, 행동도 함부러 하지 못한다. 타블로이드의 천국 영국 언론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이다. 모범을 보이기 위해 군대도 자원입대해서 전쟁터를 누벼야 하고, 아마 결혼도 왕실이 정해준 사람과 할 것 같다. 여왕이 아들에게 당한 배신감을 손자에게 또 당할리는 없을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불안불안한 생활을 하는 윌리엄은 힘이 들 때 기댈 대상이 없다. 생각해보자. 어렸을 때 학교 끝나고 친구들을 뒤로한채 집으로 달려가는 이유는? 빙고! 어머니 때문이다. 물론 어머니가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셨기 때문일 테지만. 아무튼 이런 소중한 어머니가 없는 윌리엄왕자의 생활은 천만금을 줘도 바꾸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는 지금 윌리엄 왕자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 딱 한가지 윌리엄 한테 자랑할 만한 것이 어머니였는데, 영국에 없고 한국에 계시기 때문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해도 일찍 져서 어두침침한 방안에 들어오면 우울 그 자체다. 앞서 말했지만, 세상은 참 공평하다. 영국의 여름은 10시가 되도 해가 지지 않는 말 그대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였지만, 반대로 겨울은 4시만 되도 어둑어둑해지는 '암흑의 나라'로 변해버린다. 지금이 6시 좀 넘었는데 마치 밤 11시는 된 듯 하다. 게다가 밖에는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있다. 이런 날 창 옆에 앉아 있는 이유는? 라지에이터가 창문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선진국으로 불리는 영국은 불쌍하게도 라지에이터를 사용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한국의 훌륭한 난방시스템을 설명하면 사람들이 까무러친다. 아니 그런 환상적인 난방이 존재했냐는 반응이다. 벽 한 켠에 붙어있는 쇠철판에 나오는 열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온돌이 꿈만 같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결국 여름에는 천장 높아서 좋다고 자랑했던 내 방은 작은 라지에이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여 썰렁한 냉기가 돌고, 방이 넓어서 탁구대 놓아도 좋다고 자랑했건만 텅빈 방이 왜이리 서글퍼 보이는지. 결국 라지에이터 옆에 앉아 나의 서러움을 글로 남기는 일이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다.

    더 큰 문제는 내 나이 25살, 영국식으로는 24살이긴 하지만, 그래도 20대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내 외로움을 기댈 대상이 어머니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전화걸 여자친구도, 좀 청승 맞지만 옛 여자친구도 없고, 심지어 첫사랑의 추억도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요즘 같은 영국의 전형적 '호러블' 날씨에는 이런 자책감이 더욱더 깊어진다. 게다가 이제 곧 크리스마스이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최소한 크리스마스마스에는 이성과 함께 데이트를 했다. 관계가 크게 발전된 적도 없고, 그럴 의도를 가지고 한 것도 아닌 그냥 의례적인 데이트였다. 영화보고 밥 먹고 차 마시고 공원 좀 걷고 그 정도. 그래도 이런 데이트가 나에겐 큰 위로이자 상이었다. 데이트 신청을 하고 코스를 정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파트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참으로 즐거웠다. 그런데 올해는 매년 딱 한 번 했던 그 데이트도 할 수 없다. 이건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다. 크리스마스에는 이곳 영국 본머스에 아무도 없다. 물론 내가 아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다. 이제는 어학연수를 마친 친구들이 한국으로 다 돌아가고, 학교에 있던 몇몇 외국 친구들 조차도 가족을 찾아 본국으로 돌아가는 시즌이 되었다. 이곳에 올 때는 외국에서 크리스마스 보낸다는 설렘에 친구들한테 자랑까지 했는데, 실상은 재난과 다른 없다.

    내 첫 데이트 영화는 '러브 액츄얼리' 였다. 아직까지도 그 날의 설렘은 잊을 수 없다. 눈도 살짝 내렸던 것 같다. 안타까운 점은 영화만 좋았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데이트 초보가 저질르는 끔찍한 실수들로 가득차 있다. 어쨌든 이 영화 만큼은 자꾸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한동안 이 영화의 OST를 두 달 넘게 듣기도 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영국을 배경으로 찍은 것이다. 며칠 전 부터 이 영화를 보고 있는데 - 이 영화가 몇 부작인 것은 아니지만 한번에 다 보면 아까워서 조금씩 나눠서 보는 중이다. - 예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몇 가지 사실들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확실히 영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영화감상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내가 좋아하는 휴 그랜트가 영국 수상으로 나오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은 내가 8개월 전 영국에 첫 발을 내뎠던 히드로 공항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밖에도 영국 수상관저나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거리들도 내가 한 번씩은 지나쳤던 곳이라서 영화를 보는 내내 즐거움이 훨씬 더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이 영화의 주제가 사랑에 대한 것인 만큼 정말 다양한 케이스의 사랑이야기나 등장하고 있는데, 왜이리 내 마음을 설레게, 그리고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다.

    여러 커플들이 등장하지만 - 심지어 포르노 배우들의 사랑도 나온다. - 그 중에 두 커플이 단연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다. 첫번째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스케치북 프로포즈의 그 남자다. 이 남자는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을 한 여자를 미워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심지어 사람들이 게이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하지만 알고보니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자신이 한 눈에 사랑에 빠진 여성이 자기 베스트 프랜드와 결혼할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도 이 마음은 잘 안다. 가끔씩 정말 괜찮은 애가 내 친구와 사귀는 사이라서 마음을 접어야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이 남자에게 가장 창피하고 난감한 상황은 결혼식 비디오를 보여달라고 다짜고짜 찾아온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이 들켰을 때다. 비디오는 온통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는 언어를 초월한 사랑이야기다. 영국인 작가가 자신의 여자친구의 외도를 목격하고 프랑스 시골 한적한 곳으로 작품여행을 떠난다.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별장을 청소해줄 포르투갈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말도 통하지 않던 이들은 차차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각자 모국어를 사용하지만 대화가 통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이러저러하여 이 둘은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이들이 나눈 대화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 부분이다. 매일 청소를 마친 아가씨를 작가가 집까지 데려다 줬는데 이 날도 아가씨는 집에 데려다 줄 수 있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작가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이죠. 당신을 데려다 주는 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합니다."

그러자 포르투갈 아가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전 당신을 떠나는 순간이 가장 슬퍼요."

    하지만 이 둘은 서로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으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사랑이야기의 영화를 보면 볼 수록 내 외로움은 갈 수록 더해지기만 한다. 25살 한창 나이에, 러브 액츄얼리의 본고장 영국에서, 이 영화의 배경이 된 크리스마스를 코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있으랴. 대기만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꼭 대기만성이 사회적 성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테다. 이런 아픔과 시련은 더 좋은 상대를 만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어쨌든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모든 가게가 닫는다고 하는데, 부디 외로움의 끝에서 절망하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최소한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나 홀로 추억거리를 만들어야 할 듯 하기도 하다.

'UK Story > 본머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머스 칼럼] 영국의 크리스마스  (2) 2008.12.25
Comments